불쾌한 사람들은 항상 존재한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랬다. 아니꼽고 치사한 것들.
다른 사람의 기분은 신경쓰지 않는다. 불쾌한 언행을 던지고 대꾸가 없으면 그만이다.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더니 피해도 없고 편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반대로 다른 사람의 기분을 신경쓰고 살았다가 피해를 본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순히 부모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따르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또 다른 모든 사람의 기분을 신경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피해를 볼 것 같으면 계산적으로 다른 태도를 취한다. 예전에 불쾌한 사람 둘이 만나 서로에게 불쾌한 말을 하던 것을 보았다. 싸움 구경은 매우 흥미로왔지만 대단히 큰 격투 없이 시시하게 끝났다. 그렇다고 어느 한 쪽이 상대를 이해한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는데... 동족을 알아 본 것일까?
문제는 사실 그들이 아니라 적자생존이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는 이 세계에 있는 걸지도 모른다. 적자생존 세계에서 그들의 행동은 극히 자연스럽다. 이 세계에서 행동 기준은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도덕이 아니다. 생존이다. 생존에 도움이 된다면 약간 더 공격적이어도 괜찮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더 나은 유전자로 이해되는 곳이다.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니 옆에 앉아 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서태지는 일찍이 같은 문제로 어린 우리들의 감수성을 건드렸다. 옆에 앉은 친구는 경쟁 대상이 아닌 것처럼, 우리 세계가 적자생존 세계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옆에 앉은 친구가 경쟁 대상이 아닌 세계였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인가!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샜는데 다시 돌아와서.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불쾌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대할 것이며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싸움 vs 피함. 더러운 꼴을 보기 싫으면 피해야 한다. 또라이들을 상대하는 건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다. 인생이 한 열 번쯤 주어지면 한 번 정도는 또라이 소탕에 투자해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 번뿐인 인생으로 국내외 또라이들을 상대하는 정치/행정가들이 높은 보수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적극 vs 소극.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피하기엔 세상에 또라이가 너무 많다. 적극적으로 피하다간 머지 않은 미래에 깊은 산으로 들어가겠지. 소극적으로 페북 차단같은 것들이나 해야겠다.
사실 더 중요한 건 어떻게 하면 내가 불쾌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차피 적자생존 세계에 꼭 그래야 될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불쾌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유전자가 몸 속에 들어있겠거니 느낄 뿐이다.
생각하고 말하자. 딱히 대단한 수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말 한마디 한마디 하기 전에, 행동 하나 하나 하기 전에 생각해야지. 나는 머리가 느려서 아마 이 효과가 크게 드러날 수도 있기는 한데 뭐 대단히 큰 문제는 아닐 거다. 여기에 말수가 줄어드는 건 그 나름대로 좋은 부작용 같다.
나쁜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지 몸이 아프다. 😵 그래도 뭐 이것도 스트레스 덜 받고 즐겁자고 쓰는 건데. 내 마음도 모르고. 너무 합니다.
2016-12-26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