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좋은 이름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언젠가 지인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김애란 작가의 "침이 고인다"를 읽고 나는 팬이 되었다. 팬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전까지 내게 한국 소설이란, "구운몽"처럼 어려운 말들로 되어 있는 (시험에 나올 것 같은) 철학적인 글이거나 "퇴마록"처럼 내겐 관심 없는 현실 밖 오타쿠들 이야기였다. 하지만 김애란 작가의 글은 달랐다. 마치 누군가 모를 어떤 존재가 내 마음 안에서 내게 읊조리는 것 같았다. 이야기 속의 배경이나 주인공의 심리가 너무나 현실같아서 입체감이 압도적이었다. 서양 소설에선 쉽게 (아니 나라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그런 입체감이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김애란 작가의 책을 하나씩 사 모았다.

김애란 작가의 첫 산문이란다. 다른 책들에 비하면 단숨에 읽어버렸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항상 궁금하던 터에 작가의 일기장을 살짝 엿본 느낌이다. 좋았다는 말이다. 작가의 소설에서처럼 재미난 표현들이 이 '일기장'에도 가득했다.

그래서 그 시절이 행복했지? 물으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라고 대답할 것 같지만. 단지 모두가 '키 크는 무렵'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돌이켜보면 이렇게 아련해지고 마는 것이다.

맞는 것 같다. 그 시절로 돌아가라면 망설일 법도 하지만 왠지 아련한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니 만일 제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린 제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지금 네가 있는 공간을, 그리고 네 앞에 있는 사람을 잘 봐두라고. 조금 더 오래 보고, 조금 더 자세히 봐두라고. 그 풍경은 앞으로 다시 못 볼 풍경이고, 곧 사라질 모습이니 눈과 마음에 잘 담아두라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한참을 미래에 대한 기대로 살았다. 내 삶이 지금은 비록 거지같지만 미래엔 행복해질거야. 이런 막연한 기대를 하며 오랜 시간을 "현재 불행한 나" 또는 "아직 안 행복한 나"로 살았다. 하지만 그게 그렇지 않았다. 기다린 미래가 왔지만 마음은, 주변 상황은 그대로였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안 행복하면 미래의 나도 안 행복할 거다"라고. 예전 힘든 시기에 적은 한 블로그 포스트는 이런 나의 강박적인 심리 상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blog.kkeun.net/thinking/2017-02-11-enjoy

김애란 작가의 마음이 이것과 같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냥 같다고 하고 넘기겠다. (거봐! 우리는 역시 통하잖아!)

(세간에 떠도는 그녀 사진은 많다. 하지만 그녀는 실제로 봤을 때 가장 예쁘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실제로 만날 기회가 있다면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는 정말 쉽지 않을 테니 여기에나마 적어 본다.

고맙습니다.

2020-10-22 씀.